도도의 애니크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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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용. 

귀여운 냐옹이

게임과 애니를 추천하는 블로그로 시작했지만, 요즘은 게임과 애니에 대한 열정이 조금 떨어져서 당분간은 다른 주제의 글을 쓸거 같습니다. 우선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교회에 대해 얘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우선 교회라고 하니까 전도할 거 같고, 하나님 안믿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 라는 과격한 발언을 할것 같지만, 절대 아닙니다. 교회를 가든 신을 믿든, 그건 모두 여러분들의 선택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저 이 글은 어디까지 제 경험을 토대로 교회라는 조직을 삼자의 시선으로 분석한 글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뜬금없지만 저에 대해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평범한 26살 한국 청년입니다. 건설 회사를 1년 정도 다녔지만 도무지 계속 다닐 의지도 이유도 없어서 그만두고 이런 저런 알바를 하며 글도 쓰고 운동도 하고 배우고 싶은 배우며 살고 있죠. 

 

여기까지만 보면 말씀드린 거 처럼 한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남자로 보이지만, 저의 특별한 점이라면 바로 여러분들과는 다른 학창시절을 보냈다 라는 겁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때 필리핀으로 이민을 가서 무려 11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즉,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필리핀에서 나온 것이죠. 

 

뭐 그래서 제가 영어를 매우 잘합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필리핀은 한국보다 무척 종교적인 나라이고 저는 여러분들이 경험 못했을 수도 있는 여러 종교(또는 종교의 교파)를 체험해 봤다는 겁니다.

 

필리핀은 한국처럼 국교라는 것이 존재하진 않지만, 무려 국민의 92%가 기독교입니다. 실질적으로는 국교가 기독교 라고 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을 정도 입니다.  

 

그래서 인지 필리핀에서 생활하다 보면 한국과는 사뭇 다른 풍경해 놀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거실에 십자가를 걸어두지 않은 집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고, 밥 먹기 전에 기도를 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마치 희귀한 동물을 쳐다보는 것 같이 의아한 눈길을 보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의회처럼 나라의 중대한 정책을 의논 하는 자리에서도 모든 순서의 시작과 끝은 기도문이고 많은 정치가들이 자신의 연설을 "하나님의 은총이 이 나라에 함께 하기를 빕니다!" 라는 말로 끝내기도 하죠.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건 저는 기독교(Christianity)가 삶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자랐다고 말하고 싶네요.

 

일단 초등학교 시절로 가봅시다. 

 

제가 다닌 초등학교는 완만한 언덕위에 지어진 학교였는데, 이사장의 괴짜스러운 성격 때문인지 전혀 학교같이 생기지 않은 학교였습니다. 제일 처음에 지어진 유치원관은 지붕이 밑에 있고 평평한 부분이 위에있는, 마치 거인이 건물을 들어 바닥으로 꽂아버린 것 같은 그런 상하 반전된 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농구장을 중심으로 우측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함께있는 꽤나 거대한 건물이 있었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학교의 모습처럼 직사각형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 길다란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충 모양이 사다리꼴 모양이라는 거지 자세히 들어다보면 이도 저도 아닌 괴상한 모습입니다. 건물의 외벽이 층마다 다른 각도로 휘여있기 떄문입니다. 거기에다 각각 창문은 모양과 길이가 달랐고, 외벽의 색도 초록빛의 조화를 이루긴 했지만 가까이서 보면 각각 다른 색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휴 쓸데 없는 소리가 길어졌네요.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제가 다닌 학교는 그 지역에서 "이상하게 생긴 학교"로 유명할 정도로 외관이 특이했지만, 안에서 배우는 내용은 다른 학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조례할때 운동장으로 나와 필리핀 애국가를 부르고 대표자가 나와 기도했으며, 반으로 돌아가서 1교시 선생님이 들어왔을때 또 다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어 모두가 신나게 도시락을 꺼내면 쉴틈 없이 떠들썩 했던 아이들이 갑작스레 조용해지고 늠름한 표정으로 식전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교 전에 귀갓길을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다시 한번 기도하죠.

 

저는 이렇게 타의로 인해 하루에 적어도 네번은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전혀 기독교와 가깝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그리고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해주는 여러 이야기를 듣고서 기독교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죠.

 

그 시절 제가 이해한 기독교는 이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있다. 그 셋은 우리를 삼위일체 같은 존재이며 그들을 믿으면 우리는 천국을 간다. 이정도 입니다. 

 

다만 해를 거듭할 수록 기독교라는 것이 이리 간단한 것이 아니란것을 깨닫습니다. 저는 기도할때 이마와 양 어깨에 십자가를 그리는 것(천주교 신자들이 기도하는 방법입니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엄마 따라 필리핀에 있는 한인교회를 가보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 군요! 다들 묵묵하게 기도를 시작하게 마지막에 아멘으로 합창하는 소리 밖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거기 있는 집사님에게 여쭤봤습니다. 

 

"왜 기도할때 십자가를 안그리는거에요?" 

 

그리고 집사님은 답하셨습니다.

 

"원래 기도할때 그거 하면 안되는 거야~"

 

"네? 그런데 학교에 있는 친구들은 다들 그렇게 기도 하던데요?"

 

"그건 천주교에서나 하는거고,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돼. 알겠지?"

 

"네..."

 

정말 당황스러웠다. 나는 기도를 다르게 하는 '이유'를 물어본건데 돌아오는 답은 이유가 아닌 '명령'이었습니다.

 

그것은 부드럽게 표현되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본질은 분명 명령이었죠. 

 

우리는 이렇게 하니까 너도 그렇게 해야돼. 

 

걔들은 틀린거니까 따라하면 안돼.

 

어린 저에겐 이것은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가는 어른들은 모두 착한 어른이며, 그들은 다들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실상은 달랐습니다. 기독교에는 수많은 교리가 있으며 각 교리마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 차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차이로 인해 예배를 드리는 방법이나 기도하는 의식이 달랐던 것입니다. 정확히 그들이 성경의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 의견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건 그들은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에  대한 방법이 불일치 했고, 그로 인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결국 서로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저의 눈에는 천주교의 기도 의식을 따라하지 말라는 집사님의 눈에 희미하지만 적대감과 비슷한 감정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는 저는 "내가 계속 이 교회를 다니게 된다면 나도 내 친구들에게 적대감을 느끼게 될까? 그건 싫은데..." 라는 생각을 했죠.

 

뭐, 초등학생이 진짜 이런 생각을 했냐? 라고 물어보신다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때에 제 안에 분명히 어떠한 차갑고 끈적한 찰흙같은 의문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과 인간을 억지로 단합시키고 억지로 분리하는 교회에 대한 의문 말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뿐 만은 아니지만, 어릴적 저는 교회에 가기가 너무나 싫었습니다. 매일매일 학교에, 숙제에 그리고 과외에 지쳐있던 저는 일요일이라도 늦잠을 푹자고 닌텐도를 꺼내 포켓몬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다만 어머니는 완고하셨습니다. 저를 억지로 일으켜 억지로 교회에 앉히셨죠.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듣는 둥 마는 둥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지만, 듣다보니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생각 이상으로 재밌었습니다. 모세가 바다를 가르고, 예수님이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삼손은 눈을 잃고서도 거대한 건물을 부술 수 있는 괴력을 선보였습니다. 

 

제가 동화책을 좋아해서 일까요? 저는 교회에서 선생님이 해주는 여러 이야기들에 저는 점점 매료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가기 싫다는 말을 점점 하지 않게 되었죠. 물론 닌텐도와 교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으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선택하긴 했겠지만요.   

 

그렇게 이러쿵 저러쿵 저도 어엿한 교인되어 갔고, 교회를 다닌지 1년 정도 되자 저는 교회에서 확실한 소속감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친구도 사귀고 여러 집사님 그리고 무엇보다 목사님과 친하게 지내다보면 마음의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고, 진심으로 예수님께 기도할 때 느껴지는 따스한 전율이 정말 좋았던 거 같습니다.

 

신앙 생활을 앞으로도 열심히 하고 착하게 살거에요. 주님도 그것을 좋아하시나까! 라는 꽤나 부끄러운 소리도 할 수 있었을 정도로 저는 순수하게 교회에 스며들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성실한 교인이 되어 가는 좋은 이야기인 거 같지만, 문제는 이 다음에 생깁니다. 

 

문제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우선 한가지를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당연한 소리지만 나와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만의 개성을 갖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외모, 피부, 성별, 가치관, 꿈, 성격, 사고회로, 좋아하는 음식 등등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남에게 지대한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조건은 역시나 필요합니다만, 저희는 각자의 인생을 이해해줘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학교에서 하루종일 수업은 안듣고 공책에 이런 저런 그림만 그리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녀를 혼내셨고, 저 또한 그녀에게 좋은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미친듯이 필기하며 바쁘게 사는 데 그녀는 언제나 한가로이 온갖 것들을 공책에 그리며 즐거운 인생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기를 한 것이죠. 

 

다만 저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바로 반성했습니다.

 

나는 나고, 그녀는 그녀다. 제가 그녀의 인생을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이제 아까 교회를 다니고 난 뒤 생긴 문제점에 대해 말하죠.

 

앞서 말한 것 처럼 저는 저와 다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고 "그렇구나~" 라고 하며 넘길 수 있었습니다. 아마 필리핀의 다문화적인 특색이 저를 오픈마인드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준것이 아닐까 싶네요.

 

다만 몇가지 예외는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나와 다른 방법으로 기도하는 필리핀 학급 친구들을 볼때면 발끝부터 치밀어 올라오는 오묘한 불쾌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냥 친구가 나랑 다른 방식으로 기도를 하나보다, 라고 생각하면 되는 꽤나 간단한 문제라고 여겼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나와 다른 방식으로 기도를 드릴때 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찌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 또한 교회라는 곳에 몸을 담그며 그들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 만것입니다.

 

우리와 다르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위에서 가르쳐 준것을 멍청하게 그대로 받아 드려 실천하는 중이다. (저도 교회에서 본 걸 아무 생각없이 따라하고 있는 주제에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이러 생각이 든 적도 있어요.)   

 

지금 와서는 이러한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내가 속한 교회가 옳다고 믿고 싶은 감정 떄문일까요? 저는 친구들을 계속해서 잘못된 크리스천으로 치부하게 됩니다. 더 불행한 것은 그때 당시에는 저는 이것을 문제라고 인식하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내가 맞고 그들이 틀렸다는 무분별한 오만함을 더욱더 견고하게 하죠.  

 

나와 반 친구들, 그니까 인간과 인간의 차이점은 그냥 그려러니 하고 넘어 갈 수 있겠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전지전능하신 신을 섬기는 방법의 차이는 도무지 용납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해코지를 한건 절대 아니지만, 마음속에서 나만은 '올바르게' 신을 섬기고 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라는 사상을 가지게 된거 같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님을 섬기고 같은 성경을 사용하는데 잘못된 섬김을 하는 그들에게 의아함을 넘어 혐오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나타나서 나 자신조차 그것을 혐오감으로 인식하기 까지 오랜시간이 걸렸지만, 그것은 분명 혐오라는 감정이었죠.

 

하나 다행인 점은 그러한 광경을 매일 같이 보다 보니까 저의 부정적인 감정도 점점 사그라지더군요. 그래서 이 일은 내 마음속에만 남아있는 이야기 입니다. 어떠한 트러블도 더 이상 이야기할 껀덕지도 없어요. 

 

뭐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믿고 따르던 교회의 가르침은 다른 교회들과 다른 점들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제가 다니던 교회는 타국에서 외롭게 어린 시절을 보내던 저를 지탱하고 있었던 커다란 기둥이었기 때문에 저는 제 교회가 절대적이라고 맹신해 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속에서 종교에 대한 1차적인 의심을 품게 됩니다.

 

저는 중학교에 들어가며 침례라는 것을 받습니다.

 

바다에서 목사님이 저를 들어 바다속으로 가라앉히는 그 순간은 정말이지 짜릿했죠.

 

그나저나 침례가 뭔가요? 세례 아닌가요?

 

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아는 건 침례는 바닷물에 퐁당 빠져야 되는 것이고 세례는 이마에만 살짝 물을 바르는 것이죠.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는 세례를 한다고 합니다. 저희 교회처럼 침례를 하는 교회는 특수 케이스 였던 것이죠. 

 

여하튼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침례라는 것이 당연히 옳고, 세례는 성경을 틀리게 해석한 것이라는 고정 관념을 갖게 된 점이죠.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 떄였나? 학교에서 recolleciton을 가게 됩니다. 

 

참고로 recollection은 회상이라는 뜻인데 정확한 해석은 모르겠지만, 종교적인 소풍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것 같습니다.

 

저희는 학년끼리 뭉쳐서 가까이 있는 어떠한 수도원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신부님과 수녀님의 수업을 듣고, 점심시간 때 적당한 레크리에션을 한 다음에 저녁 즈음 다같이 꽤나 화려한 돔천장이 있는 홀에 모였죠. 딱봐도 예배당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운데에 커다란 십자가와 단상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갑자기 양옆에서 여러 신부님들이 나오시더니 단상 양옆에 있는 기다란 책상(그것은 마치 마지막 만찬에 나오는 책상과 비슷했습니다)앞에 나란히 섰습니다. 그러고 나니 가운데에 딱봐도 대장 신부님격 되시는 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지금부터 세례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세례를 받을 학생들은 가운데에 줄을 지으세요. 만약 종교적인 이유로 세례를 받지 못하는 학생은 의식이 끝날 때까지 제자리에 앉아 있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재빨리 집에 가고 싶었지만, 이것도 수업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제자리 앉아 세례식이 끝날때까지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 거리며 예배당 중앙에 기다란 줄을 서는 아이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그들 사이에서 우스꽝스러운 원숭이 소리가 터져나와서 잠시 웃음바다가 흘렀고, 담임 선생님은 재빨리 우리에게 다가와 검지를 입술 앞에 치켜세웠습니다.

 

의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뭐라도 엄청난 것이 벌어지나 싶었지만,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신부님들이 고작 하는 거라고는 물 몇방울을 학생들에게 뿌리고선 뭐라고 조용하게 속사이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 과정은 불과 30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신부님들은 그 30초에 온 성을 담아 학생들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있다는 것이 전달되었습니다.

 

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세례는 틀리거라고 하셨는데, 왜 신부님은 저렇게 열심히 학생들에게 세례를 해주시고 계신걸까?

 

과연 침례가 진짜 옳은 것일까?

 

이것이 교회를 향한 저의 1차적인 의심이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저는 중학교 3학년이 되고 어머니는 저의 교육에 열성이셨던 분이었기 떄문에 언제나 저에게 좋은 과외 선생님을 붙여 주셨습니다.

 

저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 바빠서 일을 그만두시고 새로운 여자 과외 선생님이 오시게 됩니다.

 

언제나 단정한 단발머리에 상냥한 미소가 매력적인 20대 후반 여성이셨는데, 저는 정말이지 그녀보다 성품이 바른 사람을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깔끔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던 그녀는 언제나 수업시간 시작하기 20분전에 집에 도착하셨는데 쇼파에 고운 자세로 앉으셔서 성경을 읽으시며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수업시간이 되기 5분전이면 예쁜 톤의 목소리로 저를 부르시며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오늘 학교는 어땠는지 물어보십니다. 제 말에 언제나 귀를 기울여주시며 흐믓한 미소로 반응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민이 있는 날에는 저와 같이 고민해주시며 최선의 답을 찾아주시기도 하셨죠.

 

제 어머니는 학원을 운영하시는 지라 언제나 바쁘셔서 저에게 진심으로 관심으로 가져주는 선생님은 저에게 무척이나 큰 존재였습니다. 그럴 수록 선생님은 저를 더 가까이 하시고 가끔은 따끔한 충고도 해주시며 우리는 꽤 깊숙한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지금와서 말하지만, 저는 속으로 그렇게 찾던 부모의 관심을 그녀에게 얻은 것 같아요. 저는 선생님과 얘기를 나눌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작은 아이가 제자리에 돌아가 마음 편히 쉬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럴때면 중학생이나 된 내가 선생님에게 아기처럼 응석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볼을 빨갛게 물들이고선 입을 꾹 닫기도 했죠. 

 

아무튼 그러한 얼마 시간이 지난후, 언제나 처럼 쇼파 앉아 성경을 읽고 있는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성경을 왜 그렇게 읽는거에요?"

 

"성경을 알아야지 예수님을 알 수 있으니까 그렇지 뭐."

 

"아아 그렇구나. 그럼 선생님도 천주교인 거에요?"

 

"아니 아니,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교회에 속해있어."

 

"네?"

 

여호와의 증인. 

 

요즘은 꽤나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름이지만 그때에 나는 처음 듣는 교회였기 때문에 당혹스러웠습니다.

 

선생님이 저에게 관심있냐고 여쭤보았고 저는 여호와의 증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선생님 대해서는 무척이나 관심있었으므로 그것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에 의하면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4일뒤에 부활하셔서 어느 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실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수천명의 증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목격한것을 세계에 널리 알려야하는 사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틀릴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때는 별 생각없이 납득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날 교회에 가서 QT를 진행하시는 전도사님이었나? 아니면 그냥 집사님이었나 기억은 안나지만 누군가한테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 물어본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내심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 부류의 교회이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 

 

다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단.

 

그들은 이단이라고 하신겁니다.

 

그들은 성경 내용을 왜곡하게 해석하고 받아드린 이단이다. 그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고 특히 그들의 전도에는 절대 넘어가지 말아라. 

 

제가 믿고 있던 교회분이 제가 너무나도 존경하고 있는 선생님을 이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충격. 또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혼란스러웠지만, 그거에 대해서 깊숙하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올 뿐이어서 일단 그 사실을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교회,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주워들은 정보만 어렴풋이 알고 있던 저에겐 과분한 문제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암 저는 그래서 그냥 그 문제를 내 가슴속에 파묻어 두고 집으로 돌아가서 게임을 했습니다. 

 

생각보다 불안함은 쉽게 잊혀졌지만, 절대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분명 선택을 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생각하기 어려운 문제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교회 전도사님의 말을 믿느냐, 아니면 제가 의지하고 있는 과외 선생님을 믿느냐의 선택이었죠.

 

다만 저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을 하라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습니다. 둘 다 저의 내면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그 선택을 미루고 미뤘지만, 그럴수록 저는 어떻게 과외 선생님을 대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교회는 다수의 사람의 집단이기 때문에 적당히 얼버무리며 가만히 앉아있어도 저의 감정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과외 선생님은 매일 2시간 내지 3시간을 저와 옆에 앉아 함께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저의 혼란스러움을 숨기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선생님이 여호와의 증인 교회에서 발행하는 잡지를 가방에 넣어서 가지고 오셨습니다. 

 

제가 먼저 다가가 그것을 봐도 되냐고 어쭤 봤고,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하셨죠. 

 

저는 책상에 앉아 멍때리며 잡지를 그림책을 보듯이 대충 읽으며 책장을 펄럭 펄럭 넘겼습니다.

 

당연히 이렇다 할 감상은 없었죠. 있다면 예수님의 모습을 정말 신성하게 잘 그렸다 정도였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옆으로 다가오셔서 관심이 있다면 성경에 대해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조금 알려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든 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려고 했지만, 왜인지 어렸을때부터 거절하는 것이 참 힘들었던 저는 고개를 끄덕이고 맙니다. 선생님을 슬프게하기 싫다는 그런 마음이 분명 있었던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가끔씩 선생님께서 저에게 성경과 여호와의 증인 교인분들의 교리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일단 그녀가 가르쳐준 내용은 너무나 많아서 하나하나 여기 나열할 수는 없지만, 많은 내용이 제가 교회에서 배웠던 내용이랑 비슷했고, 몇가지 다른 부분들도 선생님의 세세한 설명을 듣다보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여호와의 증인 성도들이 지켜야하는 몇몇 규율에 대해 말씀도 해주셨죠.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분들은 생일을 기념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대충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원죄(original sin)와 관련 있던거 같지만 이것 또한 확실진 않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녀의 가족은 누구도 생일을 축하하지 않고, 누가 생일 파티에 초대하여도 정중하게 거절한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것 뿐만 아니라 알고보니 그녀는 인생 사는것이 불편해 보일 정도로 여호와의 증인 성도로써 따라야하는 규칙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이렇게 나를 가르치며 돈을 버는 시간외에는 언제나 성경공부를 하거나 무더운 날씨에 정해진 구역의 집들을 일일이 방문해 성경을 알려주시고 계셨던 겁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쇼. 만약 여러분들이 금요일날 친구들을 만나 짜릿한 불금을 보내고 토요일 아침에 침대에서 퍼질러 자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근데 갑자기 아침 10시에 누가 현관문을 두드립니다. 당신은 "아 짜증나게 토요일 아침에 누구야!? 택밴가? 아니 택배 시킨적 없는데?" 라는 의문을 품으며 뻗친 머리를 긁고 역류하는 위액을 삼키고는 현관으로 나가겠죠. 그리고 "진짜 중요한 용건아니면 화낸다..."라고 다짐하며 현관문을 소심하게 엽니다. 그러자 그곳엔 "좋은 말씀 나누러 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교회에서 왔습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건가요?

 

네, 물론 화를 내시는 분들도 있겠고, 그냥 문을 닫아버리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분명한건 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거나 더 나아가 방안에 들이시는 분들은 극소수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많이 불편하게 여기셨다면 바로 경비실에 전화 걸어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그들을 쫓아낼수도 있겠죠. 아니면 과감하게 민원을 제기해 해당 교회를 두번 다시 같은 짓을 반복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죠. 뭐 이정도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살았던 필리핀이라는 나라는 솔직히 한국처럼 치안이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민원을 보내거나 조금 소리를 지르는 정도는 귀여운 정도죠. 

 

그 분들에게 전도는 정말로 목숨을 거는 행동입니다. 

 

실제로 선생님께서는 전도중에 몽둥이 맞아 보신적도 있고, "마귀야 물러가라!'라는 고함과 함께 소금 세례를 받아보신적도 있다고 하네요. 다만 선생님에게 의하면 다른 여호와의 증인 교인 분들은 더욱더 심한 짓을 당한적도 있으시다고 합니다.

  

폭행, 성폭행, 감금, 납치 등등. 

 

선생님 처럼 어리신 여성분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거죠.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만, 이것은 한국에서는 뉴스에서만 들려오는 내용 같지만, 필리핀에서는 그리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번 수업이 밤 늦게 끝나 제가 선생님을 집 주변까지 데려다 드린적이 있는데, 조명 하나 없는 어둠칙칙한 더러운 거리. 찍찍거리며 음식쓰레기 찾아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쥐들. 골목마다 들리는 부랑자들의 웃음소리. 먹잇감을 노리는 듯이 우리를 음흉하게 스캔하는 건장한 남성의 무리. 정말로 선생님은 숨이 막히는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무섭지 않냐고.

 

선생님은 답했죠. 당연히 무섭다고. 너무나 무섭다고.

 

그런데 왜 여호와의 증인에 속해서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보니 선생님은 빙긋 웃으시면서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원하시니까.

 

저는 멍하니 선생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그녀 안에 있는 천사를 본거 같습니다.

 

교회에서 그리 가르치듯, 천사와 신은 우리의 실제 눈으로는 볼수 없습니다. 오직 영의 눈으로만 볼수 있고, 저는 마음속의 눈으로 저는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선생님이라는 매체를 통해 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선생님을 무사히 배웅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위험에 노출시키면서 까지 예수님을 전파하고, 자신의 휴식시간을 모두 바쳐가면서 성경을 모르는 무리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선생님이 과연 이단일까?

 

누구보다 선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성경을 온 성을 다해 따르는 그녀가 과연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걸까? 아니, 성경을 조금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와 그녀의 집단을 이단이라고 단정지으며 모욕하고 경멸하는 이 사회가 옳은 걸까?

 

저는 그 누구보다 그 선생님을 존경했으며 그것은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이단이라는 이유로 사회에게 미움받고 있고, 더 나아가 신에게 외면 받는 다면. 만약 그렇다면.

 

나도 그들을 외면하겠다.

 

그때 자연스레 내 안에서 어떠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교회라는 따스한 보금자리에 취해 미처 그것의 흠을 보지 못하고 있었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진실 아니었던 거야. 일단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분들에 대해 말하는 여러 말들은 기필고 틀렸잖아? 그건 확실해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모든 모욕을 반증할 수 있는 사람이 똑똑히 내 곁에 있잖아?

 

그렇다면, 만약 그들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한가지가 아니라 두가지, 아니 몇가지라도 잘못 설파하고 있을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 뿐만은 아니지만, 학업이 바빠진 관계로 저는 점점 교회를 소홀이 대하기 시작했으며 그냥 가지 말까도 했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억지로 보내셔서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긴했지만, 제 마음은 점점 교회를 떠나갔죠.

 

그렇게 시간은 지났고 저는 대학을 갔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은 어머니가 사시던 곳에서 꽤 멀었기 때문에 저는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죠.

 

그 말인즉슨, 저를 억지로 교회에 보내는 사람이 없었고, 그리하여 저는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무교의 나날들이 시작된 것이죠. 

 

그 기간 동안 제가 특별히 교회를 멀리한건 아닙니다.교회를 갈까? 라는 생각 조차 들지 않을 정도 교회, 더 크게 말하면 기독교라는 종교는 제 마음속의 휴지통에서 휴지통 비우기를 당한 것처럼 자신의 자리를 잃고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종교하고 연이 없는 인생을 살줄만 알았지만, 대학교 2학년 2학기였나? 그때부터 우리 대학 학생이라면 누구나 들어야하는 신학을 듣게 됩니다. 한국에서 대학에 나오신 분들은 이것을 의아하게 생각할실수도 있겠지만, 저희 대학은 Jesuit(예수회?) 대학 이었기 때문에 신학을 한번도 아닌 세번이나 필수적으로 들어야 했죠. 

 

그리고 저는 2학년부터 3학년 까지 신학 수업을 듣게 됩니다.

 

저를 가르치신 교수님은 학교에서 매우 유명한신 신부님이었습니다. 진짜 우리 학교에 가서 아무나 붙잡고 그 분의 이름을 말하면 바로 "아~ 그분이요?"라고  모두가 대답할 정도 입니다.

 

뭐, 내가 그분이 유명하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악명 높았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입니다.

 

일단 그는 매우 엄격합니다. 첫 수업때 그는 그의 수업에서 지켜야 하는 규율들이 적힌 용지를 적혔는데 수업시간에 1초라도 늦은 학생은 들어올 수 없다 부터, 수업 중에 핸드폰 소리가 들리면 핸드폰 주인은 바로 밖으로 나가야 하며, 자신이 내준 숙제를 안하거나 지시한 서적을 읽어오지 않으면 그 사람 또한 강당에 발을 들일수 없고, 수업시간에 질문하는 것은 수업이 다 끝난 마지막에만 가능하며 긴 시간이 필요한 질문은 학교 내에 있는 신부님들 전용 숙소로 찾아와라 등등 정말 많은 규칙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20가지가 넘는 세세한 규칙이 뺴곡하게 적혀있는 a4용지를 봤을때 정말 아찔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친구들이 그의 신학 수업을 듣지 않으려고 수강신청에 목을 매는지 알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인터넷 문제로 수강시청을 못해 그의 수업을 어쩔 수 없게 듣게 된겁니다.

 

뭐 잠시 그 분에 엄격함에 대해 얘기를 더 하자면, 저희 신학 수업이 개강하고 4번째 수업 쯤에 아뿔싸! 수업시간에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고 만겁니다. 강인한 인상을 하고 있는 신부님은 입매를 굳히고 차가운 분노를 눈속에 담으시고는 말하셨습니다. 

 

"방금 핸드폰 울린 사람. 밖으로 나가."

 

저는 그 사람을 안쓰러워 하면서도 냉랭한 분위기가 무서워서 그 사람이 빨리 나가주었으면 했습니다.

 

다만 슬프게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부님의 목소리는 더욱더 차가워졌고, 몇번의 물음에도 용의자가 자백하지 않자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지금이 너의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너 때문에 이 반은 오늘부터 신학 수업을 못듣게 될 거야."

 

응? 신학 수업을 못듣는 다고? 저는 그게 정녕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아주 간단한 말 그대로의 의미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향해 뜨거운 돌같은 한숨을 한번 쉬시더니 성경과 수업자료들을 챙기고선 "오늘부터 수업은 없다." 라고 담담하게 말하시고는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실제로 그 이후 8번이나 신학 수업을 듣지 못했습니다. 수업시간에 강당을 찾아갔지만 신부님이 수업을 거부하시고 사무실에 계시고 있던 겁니다. 

 

이제 내 성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음 학기에 신학을 다시 들어야 하는 건가? 라는 고민을 진지하게 할때쯤 다행히도 그때서야 핸드폰 사건의 당사자가 신부님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보충수업 때문에 주말에도 신학 수업을 들어야하는 처지가 됩니다.

 

암튼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저의 신학 교수님은 매우 엄격하시고 무서운 분이셔서 저는 본의아니게 신학을 매우 매우 제 전공 과목보다 더욱더 열심히 공부하게 됩니다. 수업 시간에 교수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학생은 문밖으로 나가야하는 규칙이 있었기 떄문이죠. 

 

그렇게 신학 서적(여담 입니다만 제가 읽은 모든 영문 서적중에 신학 서적이 제일 난해하고 어려운 단어도 넘쳐났습니다. 정말이지 그거 읽는데 고생을 많이 했죠)을 꾸준히 읽어가고 개인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기도 하면서 신학, 정확히는 천주교의 신학에 대해서 알게됩니다.

 

그리고 이 또한 자세히 나열하지는 않았지만, 천주교의 외경이 포함된 성경 지식은 무척이나 흥미로웠고 설득력도 있었습니다. 특히나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연옥이 존재하고 지구에 있는 우리가 그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 하냐에 따라서 그들이 천국에도 지옥에도 갈수 있다는 점은 매우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의 입장에서 보는 이상적인 연애 방법이나 인생의 목표 등등 기억나는 점은 많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내용들은 무척이나 유익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전에 천주교를 무시하고, 무의식적으로 적대시 했던 제 자신을 반성하게 돼죠.

 

또 저에게 질문 합니다.

 

근데 이렇게 다들 가르쳐주는 내용이 다른데, 누가 맞는것일까?

 

나는 누구를 믿어야 되는 걸까?

 

모르겠다. 모르겠어. 누구의 말을 들어도 모순점이 없어. 확신에 찬 눈빛으로 설파하는 것을 보고 있고자면 그들이 진심으로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만 하는데. 그들의 말을 일일이 따지고 보자면 찾을 수있는 상충되는 점들이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에휴... 참 저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죠? 

 

이제 드디어 저의 과거를 돌이켜보며 교회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겠습니다.

 

가봅시다.

 

저의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속에서 제가 경험한 교회는.

 

언제나 달콤했으며 동시에 너무나도 무서웠습니다.

 

왜 달콤하고 무서웠을까요? 제가 이런 상반된 감정을 느낀 이유는 바로 "교회는 아주 쉽사리 굳은 연대감과 맹신적인 믿음을 조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한 인간이 평생동안 찾아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연대감과 절대적인 믿음을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갑작스레 생긴 연대감과 믿음은 너무나도 달콤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얻기도 무척 쉽습니다. 그저 믿기만 한다면 신께서 그것을 주시니까요. 

 

그것이 과연 진정하고 영구적인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연대감과 믿음을 통해 많은 분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고 인간은 교회에 취하게 됩니다. 

 

마치 정신과 몸에 해롭지 않는 술과 같죠. (이것이 제가 무섭다고 느낀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중 연대감은 정말이지 마약과도 같다, 고 말하고 싶은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유명한 사람이 말했듯이 모든 인간의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연대감을 통해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죠.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교인들 뿐만아니라 절대적인 신에게도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받게 되고, 그것은 만인의 질병인 애정결핍을 치유합니다. 평생동안 채워지지 않을 것으로만 여겼던 커다란 마음속의 구멍이 교회의 설파되는 말씀을 통해 채워지는 것이죠.

 

그리고 많은 교인들과 절대적인 신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믿으며 행복이 치밀어 오르는 듯한 감각을 경험합니다. 감동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요. 

 

그렇게 사람은 교회에 의존을 하게 됩니다.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거... 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인생의 중심에 교회를 두게 됩니다. 

 

뭐, 저는 이러한 교회에 대한 의존성을 술과 마약으로 비유를 들며 부정적이게 표현했습니다만, 이러한 의존은 몇가지 함정만 조심하다면 긍정적인 성장을 위한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새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뭐 굳이 예를 들자면, 제가 책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아동 시절 부모에게 마땅히 받아야할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어른들은 대부분 커서 문제아가 되거나 여러 정신적인 질환을 달고 살게 된다고 합니다. 바로 어린 시절 구축되어야 하는 "안정 애착"이라는 마음의 안전기지를 구축하지 못하여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방황을 하거나 알코올, 도박 등 억지로 도파민을 분출 시킬 수 있는 수단에 집착하게 되는 거죠. 슬픈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책에서 연구한 아이들 중 3할은 놀랍게도 정상적인 어른으로 자라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던 걸까요?

 

바로 그들은 부모를 대신할 어떤 존재를 찾은 것입니다. 그것은 옆집 아저씨, 삼촌, 할머니 그 누구도 될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도 거기에 큰 부분을 차지하시죠.

 

즉 불우한 환경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거하며 성직자 분들에게 의지한 분들은 청소년기 이후에 "획득된 안정 애착"을 갖게 된 것이죠.

 

이런 것이 바로 교회의 좋은 점 같습니다. 상처 받은 이들을 영구히 치료할 수 있는 마음의 병원 같은 역활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제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분들을 예시로 들긴 했습니다. 불안정 애착 현상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특히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쉽게 찾아볼수 있는 사회의 고질병이며 많은 분들이 교회를 다니시며 신을 만나 치유받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저는 교회란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가치 생산 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말이지요. 

 

다만 그럼에도 제가 교회에 대해 무서워하는 이유는 교회를 다니다 자칫 잘못하면 빠질 수 있는 위험한 함정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부터 교회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점들을 서술하겠습니다.

 

첫째, 교회란 완벽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신론자라면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교회에 다니며 교회에 속하게 되면 이 사실을 아주 쉽게 망각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아무 의문 없이 받아 드립니다. 만약 그 가르침이 자신의 인생의 데이터를 통해 깨우친 진리와 대척점에 서있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천천하게 하지만 확실히 자신을 변화 시킵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만약 친구가 갑자기 우리에게 "야, 너 이러이러한 점이 안좋으니까 고쳐!" 라고 말한다면 일단 생각은 해보겠지만, 끝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행동하게 될겁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결국 제일 중요한 의견은 우리 내부의 의견이니까요.

 

다만 교회에서 설파하는 말씀은 한 인간의 의견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의 말씀이 저의 생각과 다를 때엔 저는 어쩌할 도리 없이 살짝 의문을 품지만, 결국 목사님의 설교를 찬찬히 듣다보면 의문이 사르르 사라져 갔습니다.

 

이미 저는 신을 통해 마음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떄문에 신의 말씀 = 구원이라는 명제가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 있었고, 그것은 곧 저를 파블로프의 개처럼 목사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에 귀를 쫑긋이며 올곧은 진실로 받아드리게 한겁니다.  

 

즉, 완벽하지 않는 말씀을 완벽하다고, 틀림 없다고 받아드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현대 사회의 인간은 정말로 양극화가 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상처 줄 수 있는 것에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을 열지 않지만, 자신을 치유하는 요소들에게는 지나치게 수용적입니다. 

 

흠... 제가 이것에 대해 좋은 예시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한국 교육에 관련된 예를 들어보죠.

 

한국의 교육열이 대단한건 다들 아시죠? 그래서 인지 한국 학생들의 하루 스케줄은 정말로 끔찍합니다. 살인 스케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죠. 아침 일찍 학교에가고, 그 다음에 수학 학원, 영어 학원, 그리고 피아노 학원 등등 저녁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사교육에 괴롭힘 받다가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면 다시 숙제와 복습을 해야하는 상황이 옵니다.

 

뭐 제가 많은 나라의 교육시스템을 경험해본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교육이 유별나게 어려운것은 아닙니다. 학생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한국의 교육을 어렵게 만든것이죠. 그렇기 떄문에 옆에 앉은 친구 보다 더 낫고, 더 좋은 대학과 직장,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미친듯이 발버둥을 치게 되죠. 

 

슬프게도 그것이 현재 한국 사회입니다.

 

그리고 깜짝 놀란 건데, 제가 책을 사려고 네이버 도서에 들어갔는데, 판매량 순위권에 있는 책들의 90%는 돈 또는 성공과 관련되어 있더라고요. 신기해요.  

 

아무튼 여러분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거 같으세요? 

 

경쟁 의식이, 즉 더 많은 돈을 얻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한국인의 본성이다? 우리는 원래 이랬다? 그건 또 아닌거 같거든요. 

 

제 의견에는 우리는 먼저 부모 세대의 뿌리 깊은 힘겨움을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거의 1960대 아니면 1970년대에 태어나셨을 텐데, 그때의 한국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여서 매우 가난했습니다. 밥도 제때 못먹어 굶주린 배를 붙잡고 억지로 잠을 청하셨겠죠. 

 

다만 한국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단결력으로 똘똘 뭉쳐 엄청난 양의 노동과 노력을 통해 80 90년대 과도기를 걸쳐 한국을 현재 경제강국으로 성장시키셨죠. 그래서 한국은 작은 면적을 제외하면 세계 어느 나라하고 비교에도 꿇리지 않는 부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른들이 피나는 노력을 전혀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제가 지금 좋은 나라에서 좋은 인터넷을 쓰며 편하게 살 수 있는 겁니다. 

 

다만 한가지 문제점... 이라기 보단 피할 수 없는 결과로서 우리 부모님들은 노력 = 가치 = 돈 = 성공라는 마인드를 가지게 되신 분들도 있고, 그리하여 우리 아이들이 돈을 많이 벌고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그들에게 공부라는 노력을 미치도록 시키시죠. 그리고 그 공부를 방해하는 것들, 대표적으로는 게임을 아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멀리하셨습니다. 

 

여기서 부모님들의 양극성이 드러납니다.

 

아이들의 성공을 위한 일들(학원)은 과도하게 수용적이시고, 그 반대로 아이에게 피해가 갈거라고 여겨지는 게임은 과도하게 멀리 하시는 거죠. 

 

그리고 마음이 여린 친구들은 부모님들의 강요에 이렇다할 저항도 못하고 곧이 곧대로 따르게 됩니다. 다만 그러한 현상은 학생들의 맘을 점점 병들게 하며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살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릅니다. 그리고 학생들 안에 있던 마음의 상처들이 한번에 터져버리죠.

 

그리하여 참으로 모순적인 일이 일어나요. 학생들은 자신이 해야하는 공부를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것으로 인식하여 극도로 부정하고, 그저 스트레스 해소용이었던 게임에 위험할 정도로 매달리게 됩니다.

 

뭐 이것이 좋은 예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의 양극성은 사회의 많은 부분을 통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죠.)

 

여하튼간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어릴때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자란 우리는 상처를 일으킬수 있는 것들에 대해 극도로 민감해졌고, 그 반대로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대해선 과도하게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게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설파되는 내용 즉, 성경의 핵심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지에 대한 하나남 약속에 대한 내용인데, 그 말씀은 우리의 목이 탈듯한 갈증을 영원히 채우고, 그 어떤 열매보다 달콤한 열매가 되어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갈구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갈구하고 갈구하여 그것에 독이 섞여 있더라도 일단 마시고 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해가 될지라도 우리의 뇌는 이미 그것을 청렴한 생명수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은 아주 한 인간의 인생을 회복 불가능한 지점까지 병들게 할 수 있는 위험한 함정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교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것은 오직 신뿐입니다.

 

세상에 있는 어떠한 인간도(그 사람이 성인이라고 불린다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며 마음 속에는 악이 들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목사님들 또한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계속 다니다보면, 신의 말씀은 모두 목사님의 목구멍을 통해서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헌신적으로 받아드리며 우리 마음속에 일체화를 시키죠.

 

저는 이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목사님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자신의 생에 적용시키는 것이야말로 교인의 진정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다 보면 우리는 이상한 감각에 사로 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목사님들을 포함한 교회를 이끄는 분들을 마음속으로 신격화하는 겁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철저하게 부정하는 행동이지만, 인간은 어떠한 때는 정말로 간단한 생물체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념은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고, 더 나아가 왜 목사님들을 신격화 하는 것을 멈춰야 하는 이유조차 망각하게 됩니다.

 

이건 저의 경험일 뿐이지만, 교회에서는 뭔가 목사님을 더 높은 차원의 인간을 대하듯이 섬깁니다. 그래서 저같은 평신도들은 그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무의식적으로 목사님을 마음안에 특별한 곳에 머물게 하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신보다 더 큰 목사님이 탄생하고, 성경보다 더 높은 교회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몇번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교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간혹(때론 자주) 잘못된 내용을 설파할 때도 있고, 목사님이 명백히 잘못된 행동을 저지를 때도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못본척하고 넘어가죠.

 

실제로 예전에 뉴스에서 어떠한 성직자가 성범죄를 일으켰을 때도 그분의 신도들은 그를 보호하고 변호했죠. 

 

바로 그들의 행동은 100% 옳다고 믿고 싶은 마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들은 이미 신도들 마음 속에서 신과 비스므리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죠. 무서운 점은 이런 과정들은 전부다 무의식속에서 처리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죄책감 없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죠.

 

, 아무리 예수님만 바라보는 신앙을 하는 사람도 조금 잘못하면 이러한 함정에 빠질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신격화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무척이나 위험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사이비 종교에서 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평범한 교회에서도 이러한일 은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 너무 이러쿵 저러쿵 얘기한 거 같아서 잘 알아들으셨을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교인들이 기억해야 하는 점을 계속 말하겠습니다.

 

아마 이 부분이 저의 글의 핵심이 될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 교회"만" 옳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교회들도 옳다고 인정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그 수를 세라고 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많죠.

 

다만 한국에 있는 대다수의 교회가 장로교에서 시작된 교회인지라 여러분들은 교회가 다 비슷비슷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세상엔 수많은 교회들이 있고 그 교회들이 속한 교리들 또한 많습니다.

 

한국에는 대표적으로 장로교 교회가 매우 흔하죠.

 

하지만 외국에 나가기만해도 천주교가 국교인 나라도 있고, 아니면 성공회(?)같은 교회가 주를 이루는 나라도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여러 교회를 다녀봤고, 그들의 가르침을 잠깐이지만 경청을 하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직접 물어봐 다른 교리들과의 차이도 알아냈죠.

 

놀랍게도 교리들 중, 여호와의 증인처럼 색이 짙은 교회가 있는 반면, 몇가지 의식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익히 아는 장로교 교회와 비슷한 교회도 있었습니다. 제가 한때 다니던 침례교 교회가 그런 쪽이었죠.

 

이렇게 교회끼리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없다 해도 교회와 성당을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꽤나 커집니다.

 

지금까지 성당 vs 교회. 즉 개신교 vs 천주교라는 싸움은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는 중입니다. 그들은 종교의 기준이 되는 성경 조차 조금씩 다르고 수 많은 의식과 규칙이 다릅니다.

 

그리고 성당과 교회, 그리고 여러 다른 교회들을 직접 다녀본 사람의 입장으로서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논리를 통해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데, 그 논리에는 모순을 쉽게 찾아볼 수 없고, 가만히 듣다보면 굉장히 설득력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눈에 빛을 내며 열변을 토하는 그들을 바라볼때면 정말로 그들 안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되죠. 

 

다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런 저런 교회를 다니다 보면 모든 목사님(또는 신부님)에게 전부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혼란스러움이 옵니다. 모두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왜 다들 말하는 것이 조금씩 다를까? 아니 거의 반댓말을 하는 경우는 도대체 왜 일까? 그리고 그들이 가끔 다른 교회들을 비판하거나 헐뜯을 때면 더욱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직접 다녀본 바 그들이 헐뜯는 교회들도 모두 좋은 교회였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가득한 교회로 보였거든요.

 

다만 이러한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저 혼자 였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며 자신이 믿는 교회의 교리가 맞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다른 교회를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은연중에 자신의 교회만이 옳은 의식, 옳은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밝히는 것 같았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저도 한때 교회에 대한 애정이 많았고, 제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불완전하다는 생각은 하기 싫었기 때문에 다른 교회들이 열등하다고 여겼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다른 교회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배척했습니다. 우리 교회를 우선시 했고, 가능하다면 그들과만 같이 행동을 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나온 분들을 볼때면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취했지만 그것은 가면에 불과했고, 속으로는 그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그들을 나와는 다른 사람들로 분류한것 입니다.

 

다만 그 이후 여러 교회들을 다녀보니 생각이 바꼈습니다.

 

모두들 하나 같이 역사깊은 교회이고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는 훌륭했으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교인들의  행동거지 또한 선하고 모범적이었습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보다 낫다고 판단되는 부분도 많았죠. 

 

그런 경험을 직접 하고 나니 우리 교회"만" 옳다는 선입견이 산산히 부서지더군요.

 

그리고 저는 대학에 다니면서 천주교의 신학을 공부할때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는 왜 모두 같은 성경, 같은 신을 믿으면서 서로 다른걸까? 하지만 한명 한명의 설파를 듣다보면 저는 죽어도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한 감각이 계속되다 보니 저는 근본적으로 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 굉장히 혼란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모두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다만 그 누구도 믿지 않기는 싫었던 거죠. 왜냐하면 모두들 제가 존경하고 있는 분들이었기 때문이까.

 

그리고 깊은 숙고 끝에 이러한 질문이 들더군요.

 

모든 교회는 거짓말쟁이 일까?

 

다들 숙련된 사기꾼일까?

 

아니, 물론 그 중에서도 성경을 온전하게 받아드리고 성경의 말씀대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 있을테지만, 성경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저는 그런 교회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도무지 몰랐습니다. 애초에 그런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고요. 그리고 이건 제 추측이긴 한데 성경에 나와있는 모든 내용을 그 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집단은 지구상에 없을겁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교회가 자신만의 해석으로 자신만의 하나님을 마음속에 만들어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죠. , 믿고 싶은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같은 신을 믿고 같은 성서를 사용하는데 서로 다를 뿐만아니라 어떠한 때는 서로 헐뜯는 장면들을 설명할 방법이 저로서는 전혀 없었습니다.

 

즉 저는 이러한 결론에 다다른 것입니다. 모든 교회는 자신만의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고 있다.

 

잠깐만 기다리십쇼. 이것이 저의 결론이 아닙니다.

 

몇달 전만해도 저는 기독교는 사기다! 라는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요즘 시간이 남아 성경을 읽다보니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저는 교회에 앉아 목사님들이 설명해주는 성경을 들었을 뿐 성경을 직접 읽어본 경험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목사님들의 말씀이 성경 그 자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다만 목사님들이 성경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신것이 아닌 긴 시간의 묵상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성경의 해석을 전달해주시는 것이었죠. 

 

그러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그 본질이 아니라 그 본질을 해석한 인간의 해석을 듣는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거부감이 들수도 있지만, 성경에 특성상 이것은 어쩔수 없다고 말하고 싶네요.

 

성경은 굉장히 모호한 책입니다.

 

수많은 비유들, 모순들, 오해의 소지들, 시대적 프레임, 의미불명한 구절들 까지. 

 

저도 꽤나 성경을 열심히 읽었지만, 성경이란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수께끼 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충격스러운 것은 여기서는 A가 B다라고 하시고 다른 구절에서는 A가 B는 아니다 라는 말이 있어서, 어떠한 것을 받아드려야할지 굉장히 혼란스럽죠.

 

뭐, 책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경을 쓰신 이유가 나오긴 합니다만, 이유를 알았다고 해서 성경 내용이 참으로 알아먹기 힘들다는 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떤 구절 그리고 어떤 책을 우선순위 상위권에 올려두느냐에 따라 나머지 내용이 크게 달라 질수 있는겁니다.

 

그렇기에 같은 책을 읽어도 수 많은 해석이 나올 수 있고, 지금날 셀수 없이 많은 기독교의 교리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겁니다.  

 

즉 저 교리는 맞고 다른 교리는 틀리다, 라는 생각은 잘못 된거고.

 

모든 교리는 옳다.

 

그렇습니다. 저는 모든 교리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15세기 천주교 신부들처럼 성경에 없는 글을 지어내어 면죄부를 판다던가 하는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교리들을 제외하면요.) 

 

그들은 모두들 자신만의 하나님을 내면에 만들어 그 하나님을 설파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들 결국 하나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영을 통해서 말이지요.

 

다만 하나의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왜 모두가 바라보는 것이 다른걸까요? 

 

그것의 이유는 하나님이 너무나 거대하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고 나와 있을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를 초월하신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다른 시점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어떤 교회는 하나님을 우측에서 바라보고, 다른 교회는 왼편에서 바라보고, 성당은 뒤편에서, 누구는 아래에서, 누구는 위에서 이렇게 다들 다른 시점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영으로 같은 하나님을 보고 있어도 어디를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떤 해석도 감히 틀렸다고 말할수 없죠. 

 

네 그렇습니다. 틀렸다 맞다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입니다. 만약 틀렸다고 해도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이시겠죠.  

 

우리는 인간이 그 크신 하나님의 뜻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야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교회인들의 믿음을 폄하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하죠. 

 

우리는 교회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신을 섬기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만들 싸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나온 저의 억지 논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이리도 수백개로 쪼개진 기독교의 교파들과 그들이 헐뜯는 모습을 안좋아 하실거라고 믿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기네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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